‘너에게 가는 길’과 하이퍼리얼리즘 아닌 풍선껌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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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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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성소수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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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부모모임을 다룬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변규리 감독, 2021)’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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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부모모임이 생긴단 얘길 처음 들었을 때 징글징글한 예감을 했었더랬다. 익히 아는 그 PFLaG 이상의 기획. 너무도 싫고 거부하려 들지만 끝내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가족주의. 결국 그 굴레 안에서 나는 이들의 존재에 감동하고 별 수 없이 포획되고야 말 것이라고. 진짜로 영악한 기획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랬고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론 정말로 기꺼웠다. 영화로 나온단 얘길 들었을 때 예상했던 것들도 있다. 현실의 것이라 믿기 힘든 이상적인 가정. 핍진하면서도 배울 것 많은 가정. 규정하기 나름인 각자의 가정들. 그 가정들이 규범을 넘나들며 생각할 거리를 주겠지. 과연 그랬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것들도 있었다.
나 혼자 하는 말이지만 "하이퍼리얼리즘 무지개"라고 부르는 어떤 색감이 있다. 무지개가 활용된 형형색색의 디스플레이에도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잔혹한 색감. 희망을 주고, 알고 보니 희망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남은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니 힘을 내야 한다고 언술하는 그런 색감. 서사의 테두리 안에서는 감동을 주는 꽉 닫힌 해피엔딩. 하지만 그 이후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선 씁쓸한 뒷맛이 남는 엔딩. 그리하여 출연한 이들을 어딘가에서 마주쳤을 때 내적 친밀감과 염려와 고통이 정확히 1/3씩 혼재된 시선으로 보게 되고야 마는. 그렇게 만드는 어떤 색감. 그래서 < 너에게 가는 길 > 포스터를 봤을 때 조금 놀랐다. 이렇게까지 몽글몽글하다고? 풍선껌 색감의 한국 성소수 다큐영화라고? 가능할까? 실망하진 않을까?
결국 부모모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부린 위악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바랐다. 그것이 내 가족이기를 더군다나 원했다. 솔직하게 바란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취약해서 비틀 수밖에 없었던. 그런 영화였다고밖엔 말할 수 없다.
보는 사람들만 보는 영화, 정작 봐야 할 사람들은 보지 않을 영화. 그런 영화가 맞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영화라고 느꼈고. 코멘터리 붙은 감독판을 다시 보고 싶다. 연분홍치마의 커밍아웃 연작에서 오늘 가장 생각이 난 건 <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 였다. 레정기에서 최현숙은 고립감을 느낀다. "나는 친구가 없어"라며 울며 토로한다. 그리고는 일응 응답을 받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 뒤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정말로 응답, 아니 그렇다기보단 받아 마땅한 보답을 받았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프레임 밖에서도 행복한 최현숙과 친구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었다. 오롯이 내 문제인데, 그것은 감동이지만 상처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은 오래된 상흔에 다시금 연분홍치마의 영화가 말을 걸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가 바랐던 그런 관계가 분명 있어. 그건 가능해. 심지어 죽음에의 정동조차도 품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게 분명 존재해... 휴지를 준비해서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정작 준비해야 했던 것은 피식 터지는 실소에의 대비였다. 많이 울었고 더 많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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