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커밍아웃하면… 그렇구나 이러면 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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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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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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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커밍아웃하면 힘내 말해줘서 고마워 정말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렇구나 이러면 됨." 나에게는 옳으면서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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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커밍아웃하면 힘내 말해줘서 고마워 정말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렇구나 이러면 됨." 나에게는 옳으면서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최근 상담을 받는데 - 내 AT필드가 넘 단단해서 선생님과 나 모두에게 험난한 시간이지만 진득하게 받고 있음 - 선생님의 부던한 노력 끝에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어떤 커밍아웃에서 나는 기대하는 바가 분명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대는, 이 커밍아웃이 "별 일 아닌 일"로 해석되어 우리 관계와 무관한 것으로 끝나는 걸로는 충족될 수 없다는 것. 우리 관계가 변화하고, 이 사실이 자주 언급되고, 모르는 걸 물어보고, 나는 당사자성 있는 자학개그를 치고 웃는 친구들에게 '웃어?'라며 뇌절하고, 그 상황이 또 편안하지만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바랐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에게 커밍아웃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기대는 배반당할 수도 있다. 아, 책임소재를 물을 수는 없는 배반이다. 하지만 어쨌든 기대가 부응받지 못하는 상황은 온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어쩌면, 기대가 배반당한 상황에서도 "그럴 줄 알았어"라며 "세상에 결국 온전히 이해받는 커밍아웃이란 없지" 같은 위악은, 내가 취약했기 때문에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네."라고 인정하고 덮은 후,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이런 자기성찰 짧게 하고, 은하선 님의 원래 논지에는 동의한단 이야기를 하고 나서 턴을 종료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커밍아웃이 떠올라 좀 더 글을 이어본다. 처음 보는 퀴어타치들과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하여 종종 하는 이야기다. '저 대학 다닐 적에 취미생활이 잘 맞았던 대학 동기에게 커밍아웃 했거든요. 그 동기에게는 제가 커밍아웃한 첫 게이였대요. 근데 공교롭게도 그 동기의 당시 애인에게도 유일한 게이 친구가 존재했고, 이 커플은 그만... 자신들 세계 속의 유이한 두 게이를 소개팅해주어 더블데이트까지도 노려보겠다는 love conquers all 류의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이태원에서 만났어요. 좋은 사람인데 식은 안 되더라고요.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쪽이 좀 더 예의 바르더라고요. 예의상 몇 번 더 연락을 주셨는데 제가 그냥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을 아낀단 느낌으로 읽씹하고, 끝.' 30% 정도의 사람들은 '으...'라고 말하고, 50% 정도는 가벼운 비웃음을 섞어 깔깔댄다. 그러라고 비언어적 표현으로 MSG 잔뜩 뿌려서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들긴 한다. 그 친구가 택한 수단이 능숙하거나 효과적이진 않았을지언정, 내 커밍아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최선을 다하여 대응해주긴 하였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걸 충분히 인정하지 않아왔던 것 같다. 내가 원한 것들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려고 노력했던 건데. 아, 이 친구와는 이후에도 잘 지냅니다. 에피소드가 좀 더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그러니까 말이다, 내 자아와 자존이 많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사캐즘이란 이름의 방패 뒤에 숨어서만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 냉소적으로 그 무엇으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고 관조하며 평가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꽤 좋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서툰 것들을 긍정했다면, 그리고 나는 무언가 더 바라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간혹 그 이야길 하여 더 크게 잃기도 하였겠지만. 이전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걸 배우고 있다.
은하선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본질도 같은 거라 생각한다. 정말로 깊이 고민하고 사려깊게 대응할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매뉴얼하게 대응할 거라면 차라리 캐쥬얼하게 "별 일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는 덴 여전히 동의한다. "솔직히 그것보단 더 원한다"라고 말해도 잃을 걱정 크게 하지 않아도 되고, 설령 잃는대도 재기할 수 있을 정도만 잃는 그런 세상을 원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짧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저 생각이 떠올랐을 때 이렇게 정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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