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THI Bar에 다시 왔다

date
Aug 13, 2019
slug
life-after-break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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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tags
일기
여행
summary
크게 망가진 후에도 어찌되었든 삶은 이어진다.
type
Post
망가진 것들로부터 어떻게든 이후의 삶을 구성할 것들을 그러 모으려 힘쓰던 6월에 호치민이나 같이 가자는 G의 권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해본 것은 호치민 게이 씬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쎄옴(사람을 태우거나 각종 잡일해주는 오토바이) 기사들을 성추행한 경험담이나 게이 성매매 팁 같은 걸 공유하는 다음 카페에서 지금 이 곳(THI Bar)과 다른 한 곳(Republic Lounge. 바 리퍼블릭이라는 일반업소가 따로 있으니 방문하실 호모제현께서는 주의!)의 정보를 얻었다. 이 두 곳 외에는, 호치민이라기보단 사이공에 정착한 노년 게이 커플의 자아실현용 손님이 뜸한 위스키 바 하나 정도가 프렌들리한 업소인 것 같다. 처음 G를 이끌고 이 곳으로 왔을 때는 놀라고 조바심이 났다. 너무 작은 업소라서. 이 호모 구력으로 이것도 게이 씬이라고 끌고 왔다는 말인가? 같은, 아무도 하지 않을 추궁을 받을까봐서. 주말에만 영업하는 리퍼블릭 라운지가 조금 더 흰 티 입은 근육질 게이들이 초록색 레이저 빛을 받으며 명멸하는 성애적 클럽/바라면, 매일 이 업소가 떠나가라 서너시간씩 공연을 하는 필리핀 여성 보컬이 함께하는 밴드의 공연이 있는 이 곳은 그러니까 이태원 호모힐로 치면 라이브 밴드가 있는 SOHO를 상상하면 가장 가깝다고 말하면 되겠다. (물론 소호에서도 할 자들은 잘 합니다.) 리퍼블릭에서 곁눈질 레벨을 업하고 이 곳으로 이동해 한 잔 하고 돌아가자고 G와 의기투합했을 때만 해도 그저 피곤하고 빨리 숙소에 가고 싶었다. 당장 십오분 뒤에 이 밴드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고.
너무… '내 시대'의 노래들을 자기 목소리로 자기 식대로 부르는 이 필리핀 누나의 목소리에 빠지게 되는 데 필요한 건 웃기게도 요즘 노래인 despacito 한 곡이었다. 사람에 낑겨, 스피커 옆에 서서 고막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한참을 버티다 한 대 꼬룯겠다고 나가는 나를 붙잡은 게 바로 이 분의 브릿니-가가 메들리. 지금 영상을 올리는 Oops, I did it again과 ...Baby, one more time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가 휴지 없이 이어진다. 뒤의 영상이 추가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내가 따라부르느라 정신 없었기 때문이란 건 우리의 시크릿. 이래서 바틈들이란... (절레절레)
잠깐의 세뇌당한 공익광고협의회가 함께하는(역시 아님) 바텀혐오 타임을 보내고 이야기해보자면, 6월 호치민 여행의 마지막 밤도 여기에서 보냈다. 월요일에도 이 정도로 차 있는 곳인데 유독 손님이 없었던 그 날 이 누님은 나와 G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Hey my Korean friends!라고 불러주었던 것 같다. 위로라고 한다면 이것이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훅 치고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저 그 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이 불가지론자인 나에게 영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실낱 같은 표지다.
그 뒤로 취업을 했고 지난 주말 다시 G와 업무차 호치민에 왔다. 함께 출장 온 친한 회사 사람에게 비행기가 떨어지자마자 종교 유무만 확인하고 짐을 두고 이 곳 여행자 거리로 오면서 게이 바에 갈 거라고 얘기했다. 아쉽게도 배를 좀 채우고 오니 밴드 공연이 끝났지만 어찌되었든 여길 들러 데낄라를 한 잔 했고, (간특한 바텀들이 으레 그러하듯 한 잔만 하진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맥주를 한 잔 하면서도 굳이 물어보지 않는 그 이에게 다소 지연된 커밍아웃을 하고 그 뒤로 출장일정 내내 tmi를 작렬했다. 비행기에서 공황이 왔고 부쳐버린 짐 속의 약을 찾아 오만 지랄을 했고, 업무 미팅을 생각하며 두 번 정도 토를 했지만 그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G와 그 동료를 비행기로 보내고 나는 혼자 호치민에 남아 이 곳에 와서 결국 다시 이 노래를 듣고야 말았다. 나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하였고 기실 몰랐었으나 그러니까 굳이 다시금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걸 이야기해보자면, 이후에도 삶은 이어진단 것이다. 어떻게든.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정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무서워서 아직 완전한 사회적 복귀를 하진 못하고 있지만, 이런 상태에서라도 어찌 되었든 살아진다. 언젠가는 삶이 좋아지기도 할 것이다.
지난 번 G와 왔을 때 이 누나한테 Sia의 Chandelier를 불러달라 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오늘 객원 가수인 베트남 연예인이 불러주었는데, 그 영상은 따라부르는 진상 취객(나입니다…) 때문에 못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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