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음을 무릅쓰고 답답함을 풀어낸 이들에게
date
Sep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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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성명서
성소수자
summary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모임이었던, 그리고 이제 부산성소수자모임이 된 QIP의 첫 문집 e²의 발간기념 축사.
type
Post
- QIP의 문집 발간을 축하하며 -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은 그중 하나만 보여주마.
그리고 내일 또 하나.
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 심보선, <말들>
하고 많은 것 중 성소수자라는 특질 하나가 유독 할 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연유를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엄지발가락의 굳은살, 쌍가마, 오래된 흉터 같은 것과는 뭔가 다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귀찮을 정도로 생각하고, 의견을 가지고, 계속 말을 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는 때보다 못내 삼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머무른 말을 어떻게든 속에서부터 꺼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런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2015년을 사는 나와 당신들만 이렇게 답답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성소수자’가 입말의 반열에 오르기 전부터 성소수자 단체들은 간행물을 펴냈다. 20세기 말엽에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BUDDY>가 창간되었다. 그 외에도 자신의 말을 하는 성소수자들의 간행물은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의 회원모임들 또한 이 유행의 한 축을 담당한다. 고려대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사람’이 펴낸 <KUEER GUIDE>의 역사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Queer in SNU’는 2006년부터 반년간지 <Queer, Fly>를 내고 있다. 이화여대 ‘변태소녀하늘을날다’는 매년 레즈비언 문화제 자료집에 그치지 않고, 학내 호모포비아의 반달리즘과 그에 대한 ‘변날’의 대응을 정리한 자료집을 펴내기도 했다. 연세대 ‘컴투게더’, 중앙대 ‘레인보우피쉬’, 성균관대 ‘퀴어홀릭’을 위시한 많은 모임에서도 문집과 자료집을 펴낸 바 있다.
생각해보면 할 말이 있는 성소수자가 굳이 인쇄된 간행물의 형태로 말할 필연성은 없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팟캐스트, 유투브에서 발언하는 성소수자들의 재간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다. 그럼에도 인터넷과 모바일의 시대에 부득불 간행물을 내겠다는 유별난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있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내고야 마는 이유는, 할 말을 해냈다는 손에 쥘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해서일지도 모른다. 성소수자들이 수행하는 ‘인정 투쟁’의 차원에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제를 한참 벗어난 이야기이다. QIP이 문집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이런 계보와 투쟁의 역사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이 문집을 어서 읽고 싶었을 뿐이다.
이 문집을 기다린 이유는, 지금 와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나는 QUV에서 활동하면서 QIP이 쌓아온 역사를 실시간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다. 얼핏 보아도 보수적인 부산 지역에서 출범한 QIP은 부산대학교의 전국구급 호모포비아 교수와 ‘다이다이’를 뜨고, 세미나와 클럽파티를 주최하며,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단체로 참여한다. 적지 않은 수의 회원들이 선명한 의견을 모아 성소수자 인권 의제에 목소리를 낸다. SNS에서 엿본, 술자리에서의 QIP 회원들은 흥이 많다. 나는 이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회의에서 만나 같이 술을 마셔보지 못한, 여러 QIP 회원들의 이야기가 정말로 궁금했다.
여러 번 ‘한국 성소수자’를 주어로 하여 말하면서도, 나는 내가 가진 맥락과 경험이 수도권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성소수자들이 모인 QIP과 함께 활동하면서, 항상 서울에서 열리는 QUV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QIP이 들이는 노력을 전해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 이를테면 서울 도처에 산재한 인권단체 사무실, 성소수자들이 지탱하는 종로, 이태원, 홍대의 상권, 지하철 2호선을 따라 늘어선 대학들 같은 것이 어떤 이에게는 이질적이고 비일상적인 배경일 수 있다는 사실을. QIP은 명칭에서부터 지역을 명시한 모임이다. 나는 이 문집을 읽으며 우리가 가진 공통점과 불일치, 그리고 특히, 상이한 지역적 배경에 내재한 차이를 읽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과문한 탓에 QIP이 보여주기 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들이다.
나는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QIP의 문집을 기다렸다. 어쩌다 보니 축사도 쓰게 되었다. 과분한 일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쓰고 있다. 이 문집의 발간이 특히 반가웠기 때문이다. 이 반가움은 다분히 개인적인 지점에서 기인한다. 내가 ‘이쪽’이라는, 분명한 자각의 추급을 피해 다녔던 무수한 낮과 밤의 기억으로부터 말이다(공교롭게도 이 문집의 제목 또한 ‘이쪽’이다). 마침내 자각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곳에 내몰렸을 때,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세상에서 나 혼자 이런 것으로 고민하는 듯하다는 고립의 감각이었다.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디딜 곳이 필요했을 때, 다행히도 어떤 성소수자들의 말과 글이 그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나는 QIP의 문집이 또한 어떤 이에게는 그런 버팀목이 될 것을 믿는다.
끊임없이 할 말이 생기고, 어떻게든 말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이 귀찮은, 하지만 중요한 과정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 말을 소음으로 취급하여 듣는 귀와 말하는 입을 막으려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은 또 누군가의 고립에 대한 응답이 된다. 나는 여전히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이 편치 않은 한국의 곳곳에서, 우리가 이렇듯 서로의 고립에 응답하며, 더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길 바란다. 첫 문집을 펴낸 QIP 회원들께 박수를 보낸다. 감사히, 즐겁게 읽으려 한다.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의 모든 구성원을 대신하여 [e²]의 발간을 축하드린다.
대학청년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의 출범부터 함께했던 QIP 동지들과의 긴장 어린 협력관계와, 지리적으로 먼 거리 때문에 더 애틋했던 기억을 담아 새벽 감성으로 쓴 글. (…) 아오 부끄러워… 하지만 다 진심이었어.
내가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렇다고 받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부산모임 동지들은 아직도 든든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항상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