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말 베네치아와 아뻬롤 스프리츠의 맛

date
Oct 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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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ice-July-and-Aperol-spr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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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여행
summary
얼마 전 신촌 더빠에서 아뻬롤 스프리츠를 마시고 싶었는데 아뻬롤이 없단 이야기를 듣고 슬퍼서 예전 글을 다시 퍼올렸다.
type
Post
7월 말의 베네치아를 얘기하면서 태양을 빼놓을 수는 없다. 7월 22일 새벽 6시 57분 시작하여 7월 27일 오후 6시 40분 종료된 나의 베네치아 유람에서 한시라도 태양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부는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청바지 안쪽 때문이기도 했고, 또 일부는 한밤중 메스뜨레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식혀지지 않는 공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태양은 어떤 맛이 날까.
베네치아의 태양은 스프리츠의 맛이다. 거품이 이는 발포 백포도주가 반, 악꾸아 가스(미네랄 워터)가 1/5, 그리고 나머지는 붉은 압뻬롤(Aperol) 혹은 깜빠리(Campari)로 이루어진 이 술은 청량감과 함께 진한 태양의 기운을 식도에 남긴다. 얼음과, 가게에 따라서는 마지막에 달아주는 올리브를 씹고 있으려면 태양의 열기란 열기는 모두 이 술 안에 응축되어 내 뱃속에 있다. 더 이상 밖이 덥지 않다. 기름진 이탈리아의 음식을 먹고 나서 속이 좋지 않을 때 스프리츠를 한 잔 마셔주고 나면 한결 나아지기 마련이다. 태양이 너무 강해 사람들이 부풀어오르는 이탈리아,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프리츠를 체험하는 것은 필요악이다.
스프리츠를 마시기 위해서는 어디든 가도 좋다. 베네치아 최대의 유흥가 산따 마르게리따 광장 근처라면 어느 집이든지 괜찮을 것이다. 물론 길을 잃어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유람이 끝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시간이 없다면 관광객을 위한 뻥튀기된 계산표를 구비해 둔 리알또와 산 마르꼬 근처의 술집을 갈 수도 있다. 혹은 헤밍웨이의 호사를 누리기 위해 Harry's에 간 김에 벨리니를 마시고 나서 입가심으로 스프리츠를 주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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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국 후에도 한참 만들어 먹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발포 포도주와 압뻬롤, 그리고 미네랄 워터를 공수해서. 가족 모두가 선명한 유리잔에 한 잔씩 만들어 두고 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한 적도 여러 번이다. 나에게 위와 같은 스프리츠의 레시피를 전수해준 집은 위의 명소 리스트에는 없다. 산 마르꼬 광장 동쪽 까스뗄로 지구 어딘가의 'Bar Claudia'였다. 이 곳의 낮은 바는 스프리츠 제조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게 해준다. 마티니 옆에 잠시 놓아둔 진 한 잔이 정체인 벨리니 한 잔에 10 유로씩 하는 Harry's는 아닐지라도 나만의 Harry's, 이 곳은 스프리츠 한 잔에 1유로 50센트를 받는다. 잔은 위와 같은 평범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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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 마르게리따 광장 근처에서는 이런 글라스에 담아준다. 가격은 2유로를 넘었던 듯 하다. 베네치아에서 생겼던 현지 동행과 함께 '유흥가니 비싸지 않을까' 하고 덜덜 떨면서 물어본 가격이 '유흥가 치곤' 싸서 안심하고 자리를 잡았던 기억이 여전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가장 태양빛 선명한 스프리츠는 어느 집에서 먹어본 스프리츠도 아니다. 오직 두 잔, 첫 경험이었던 로마 광장의 톨 부스에서의 스프리츠와, 'Bar Claudia'의 스프리츠만이 독보적이다.
만일 당신이 베네치아에 갈 일이 있다면, 그래서 산 마르꼬와 리알또를 보고도 두어 시간 남아서 농축된 태양을 느끼고 싶다면 나는 Bar Claudia를 추천한다. 찾아가는 방법은 베네치아의 어디가 그렇듯 어렵다. 산 마르꼬 광장에서 산 마르꼬 성당 왼쪽으로 틀어, 다리가 나올 때까지 한참 걷는다. 조금 뒤 어느 골목에서 왼쪽으로 틀면 해산물 집 뒤쪽으로 낯익은 슬러시 기계가 보일 것이다. 그 왼쪽으로는 'Pizza'라는 이름의, 당신은 전혀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을 스낵 거리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밖에서 서성거리는 대신 피자가 놓인 가판대를 스쳐 안쪽으로 들어가라. 비좁으니 다른 집과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하길 바란다.
단순히 일하고 있는 남녀에게 'Spritz'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격이 궁금하다면 'El Conto(계산서)?'하고 물어보길 바란다. 당신이 어수룩한 관광객이라면, 장사 수완이 있는 베아트리체가 2유로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싼 가격이니 전혀 분개할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그 곳은 이탈리아고, 2유로로 태양을 쥘 수 있다. 스프리츠를 만드는 것이 뚱뚱한 토니이건, 클로디아건, 베아트리체건 가릴 필요는 없다. 다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탈리아의 태양을, 북부 베네토 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이 스프리츠라는 술이, 사실은 오스트리아가 베네치아를 점령했던 1800년 대에야 만들어진 술이라는 것을 잠시 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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